책장# 살인자의 기억법

이 책을 알게 된 건 영화 덕분이다. 나는 설경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설현이 연기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원작 소설만 읽고, 영화는 보지 않기로 했다. 영화 예고편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한 번 보았는데, 지금 머릿속의 장면들을 영화로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싹 사라졌다. 책으로만 기억하고 싶어졌다.

ebook기준 총 198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생각보다 엄청 짧은 소설이었다. 그런데 페이지 수 보다도 훨씬 빨리 읽었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김병수의 치매 증상이 얼만큼 심해지고 있는지 눈에 보였다. 글의 수가 점점 없어지는 부분은 좀 무서웠다. 치매가 점점 심해져서,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기억할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기억이 점점 사라지자 김병수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생각이 나지 않을 때마다 일기장과 녹음한 것을 확인한다. 그래도 본인이 희열을 느꼈던 ‘연쇄 살인의 추억’만은 잊어버리지 않았던 게 가장 무서웠다.

내 머릿속의 은희도, 박주태도 안형사도 영화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상상한 은희는 설현같은 초미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은희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밝은 모습이 아니었다. 박주태도 엄청나게 무서운 인상을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김병수의 시선으로 이 모든 사람들을 관찰했기 때문에 생긴 이미지가 아닌가! 김병수는 70대 노인이고 연쇄 살인을 했고 시를 썼다. 살인범이 시를 쓰고 있다니, 당췌 상상할 수 없는 얼굴이다. 세기의 살인범들 얼굴이 떠올랐다가, ‘시 쓰는 치매 살인범 노인’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런 상상속의 이미지들도 얼마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김병수의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고부터는, 박주태가 누구인지 안형사는 또 누구인지 어디까지가 사실이었는지, 누가 누굴 죽인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치매 노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가 살인범이 맞는지까지도 헷갈린다. 김병수가 누구인지마저 헷갈리게 하고 끝난다.

해설서는 내 맘을 아주 꿰뚫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지극히 일반적으로 책을 읽어가고 있었고, 해설을 통해 그나마 어질어질했던 머리가 정리가 되었다. 그 전까진 치매와 살인과, 사랑하는 딸 은희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병수를 쫓아가고 있었는데, 이런 어지럼증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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