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생각의 기쁨

속초 여행에서 읽은 전자책.

이 사진을 찍은 건 11월 초였다. 여행하며 읽자고 전자책을 들고 가서 절반 정도를 읽었다. 그 후, 한동안 책을 읽을 물리적인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모자랐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거의 동시에 몇 가지를 하고 있으니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손에 잡히질 않았던 것 같다. 뭐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이대로 가다간 틈틈이 책을 읽으려 하는 시간마저 싫어질 것 같았다. 으.. 안 되겠다. 잠시라도 모두 내려놓자. 한 권이라도, 만원 지하철에 끼어 읽을 것이 아니라 온전히 때와 장소를 골라 읽고 싶었다. 아…. 잠깐, 나는 이런 상태로 정유정의 28을 읽었구나. 안 그래도 복잡한 책을 ㅋㅋㅋ

TV를 껐다. 작업과 딴짓을 뒤죽박죽 병행하던 노트북도 덮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생각의 기쁨. 마음을 정갈하게 하자.

오랜만에 한 가지에 몰두했다. 독서 아닌 다른 일이었다면, 이 책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제목 그대로였다. 생각할 것이 많아 지친 나에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기쁨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동안 업계 선배의 조언에 너무나 굶주려 온 나는 책을 읽으며 조금씩 든든해졌다. 창의력을 요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휴식, 그리고 존경할만한 사람과의 진솔한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드디어, ‘생각의 기쁨’이라는 선배를 만났다. 종이책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사두기를 정말 잘 했다. 열 번도 더 읽고 싶다!

이상하게 ‘모든 요일의 기록’과 이 책을 같이 바라보게 된다. ‘모든 요일의 기록’ 덕분에 이 책을 집어 들게 됐기 때문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감동이어서, 카피라이터가 쓴 책이라면 고민하지 않고 읽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 책에 김민철 작가가 등장한다. 둘은 굉장히 친한 사이라고 한다. 세상 참 좁다. 카피라이터도 다들 연결이 되어 있나 보다. 모든 요일의 기록에서는 작가의 기록을 읽어가며 깨닫는 게 많았던 반면, ‘생각의 기쁨’은 편안한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디자이너로서 고민하는 건 우리 모두의 공감대로구나 하며 위로받았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두 책에 등장하는 박웅현 팀장님에게 좀 반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맡기고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든든한 팀장. 팀장이란 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오래 갈 수 있는지 없는지, 지내 보면 느낌이 오지 않았던가. 드라마에서 면접관이 말한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라고. 하지만 난 그 말 반댈세. 회사는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인생을 배우는 곳이다. 배울 것이 단지 일하는 기술뿐이랴. 정말 이런 팀장님, 만나고 싶다! 알고 보니 그 유명한, ‘책은 도끼다’, ‘여덟 단어’ 등의 저자이기도 했다.

노란 책과 노란 조명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이다가 그만두었다. 한 문단을 채 읽기도 전에 주옥같은 문구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책이 정말 두꺼워질 것 같았다. 아이디어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채워줄 기본기는 이런 곳에 있다. 그렇게 나라는 책장은 조금 더 촘촘해졌다.

잠들기 전까지 이 책과 대화하며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완독을 한 뒤 숙면을 했다. 그동안 책을 읽겠다며 시간의 틈을 찾아 헤맨 것에 대해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조명 때문인지 시간이 늦어서인지 눈이 침침했지만 괜찮았다. 바쁜 와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노력한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책장# 28

정유정 – 28

독서할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왠지 오래 걸렸다. 종의 기원을 읽을 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집중됐는데, 28은 스케일이 너무 커서 그런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긴박한 사건들 여러 개가 계속되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영화인가, 드라마인가. 마치 한 회차를 보고 난 뒤, 다음 회를 기대하는 것처럼 기다려지면서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이 비참하고 무서운 사건들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미치도록 힘들게 했다. 28일 동안 읽는 느낌이었다.

여러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서재형, 한기준, 김윤주, 박동해, 노수진, 링고, 스타, 쿠키 등. 개 장수의 집에서 괴질이 시작되었고 급속도로 병이 퍼지고 병에 걸린 사람들은 죽고 개들은 살처분 당했다. 전부 3인칭 시점이라, 사건을 함께 겪는 기분이었다. 사건 사고가 너무 많은데, 각 주인공들마다 점점 힘겹게 사건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 제발 제발, 악몽이 빨리 끝나게 해 달라며, 끌려다니며 다 읽었다. 굿모닝 FM 노홍철입니다의 한 코너였던 ‘세계문학전집’코너의 마지막 방송에 작가 정유정 님이 출연했었다. 개 학대에 관련된 내용을 쓰면서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사건들이 있었다. 미친 속도로 퍼졌던 무서운 병 메르스, 정부에게 외면당했던 세월호 참사, 권력에 의해 고립되고 오랫동안 숨겨졌던 광주 민주화 운동. 인정하고 해결하면 빠르게 끝날 것을, 숨기고 외면하고 떠밀면서 늦어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일이 커진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가슴이 답답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사건들과 이 책의 내용이 결코 관계없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숨 가쁜 시간은 이제 끝났다만, 아직도 멍하다. 왜 이렇게 끝난 건지. 한숨이 나온다.
곡성을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이 책과 함께, ‘7년의 밤’도 구매했는데, 잠깐 다른 가벼운 책들부터 읽고 다시 손을 대야겠다.

책장# 인간실격, 사양

인간실격

인간이 이렇게까지 자기 비하를 할 수 있을까? 서점에 들러 손에 잡히는 대로 구매했지만, 읽고 나서는 약간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나도 한참 우울한 상태인데, 감정이 고조되고 말았다. 바닥의 바닥까지 치고 나면 새 출발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텐데, 요조는 그러지 못 했다. 태생이 자기 사랑 따위 없는 사람이었다. 극단적으로. 바닥 중의 바닥의 끝에 있는 마그마를 보고 싶다면 읽어보라 추천하고 싶다. 진짜 최악으로 우울할 때 보면서 ‘아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든가 ‘이제 다시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버려야지’ 등의 생각을 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 책이 어떻게 다가올까.

측은지심일까, 그냥 한심한 걸까. 요조의 수기를 보는 동안 계속해서 숨이 막혔다. 요조는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모든 것은 내 탓이고, 내가 이상한 사람이다”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겉으로 인기인인 척할수록 마음속의 자신은 한없이 작아진다. 마음과는 달리 몹시도 쾌남 역할을 하니 온갖 여자들에게는 인기를 얻는다만, 속으로는 모든 인간을 두려워한다.

요조의 기록은 너무나도 구구절절했다. ‘구질구질’이 나으려나. 남에게 하지 못 하는 속 이야기를 아주 몽땅 쏟아낸 듯했다. 보통 자기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변명의 내용들로 가득해 보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세세하게 쓰여있었다. 설명충이란 이런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 스스로 답답함이 풀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조가 써 놓은 노트를 가지고 소설을 만들게 된 장면이 ‘후기’에 쓰여있다. 마지막을 보면, 주변인들은 요조를 겪으면서 그가 아주 착한 사람이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장면이 마담의 대사를 통해 비춰지고 있었다. 결국 요조 자신만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그렇게 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감 없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던 것이다. 여자에, 마약에 취하고 결국 하나뿐인 친구와 집사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인간 실격’, 마지막에 요조가 자신을 이렇게 칭했다

한 번 우울해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 하는 사람.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해 망상은 커져만 간다. 스스로 피로의 지름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내 친구가, 내 가족이,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우울증이 시작된다면 나는 곁에 붙어서 어느 정도 위로를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요조의 경우는 너무 극단적이라 도망 칠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이게 작가의 실제 이야기라니. 으 나에게 긍정 에너지를 주쎄요!!


사양

‘귀족 집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아하다. 고풍스럽다. 서민의 생활을 모른다. 아아, 그러하다. 그러는 나도 귀족 생활이라는 건 뭔지 도무지 모른다만, ‘사양’에 나오는 이 가족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떤 일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돈이 없으니 어머니는 가즈코에게 남의 집 가정부 일을 하라고 하고, 가즈코는 완강하게 거부한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냐고.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지 않는다. 별장에서 돈은 점점 떨어지는데 일 할 생각은 하지 않으며, 갖고 있는 옷이나 장신구를 팔아서 생활한다.

어머니는 병에 걸려 돌아가시는데, 외로움과 쓸쓸함 때문에 걸린 병이 아니었을까. 동생은 마약중독을 이기기 위해 알코올 중독으로 바꾼다. 가즈코는 집안 상황이 최악인 가운데 유부남 우에하라 씨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것도 마약 중독인 남동생에 대해 상담하다가 충동적인 키스 한 번으로 점점 그 남자에게 빠져든다. 가즈코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변명에 지나친 것이었다. 그건 답장도 없는 우에하라 씨에게 보낸 편지들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로워, 하루하루 고비인 나날이었다. 그때 가즈코가 한 생각이다.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빨리 그 남자를 만나러 가야겠다’ 진짜 미쳤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랑 혁명을 하겠다며 우에하라를 찾아 헤맨 뒤 겨우 만남이 이뤄졌는데, 술과 여자에 빠져 사는 우에하라는 가즈코를 천대한다.

가즈코가 우에하라와 향락을 즐기던 날, 가즈코의 남동생은 자살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정상이라 생각하는데, 가즈코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진 것을 마치 미션을 클리어 한 듯 좋아하고 있었다. 나오지를 떠나보낸 지 불과 한 달이 됐을 때였다.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는 사람은 가즈코의 동생 나오지였다. 귀족의 삶이 싫었던 그는 서민적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난폭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본심이 아닌 행동을 하며 힘에 겨워 마약과 술에 의지했던 것이다. 유서를 보면 나오지는 너무 착하고 연약한, 누나와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해설서를 보면,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를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책의 해설을 먼저 읽고 나서 내용을 읽어갈 걸 그랬다. 다자이 오사무가 얼마나 비극적인 인간인지 나중에야 알았다.  실은 이 모든 책의 내용이 다자이의 실제 이야기를 응용해 쓴 것이라 한다. 다자이는 39세의 나이에 네 번의 자살시도가 미수로 그쳤고 다섯 번째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세상이 그렇게까지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가? 가즈코도 요조도 세상이 자기를 비난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괴로움에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소설로 쓰면서 무엇을 해소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고통은 상상을 못 하겠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화나거나 슬픈 일도 사라지곤 하는데, 결국 죽음을 선택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우울함이었다. 두 번 읽고 싶지 않은 책이다. 세상 밝은 책을 읽어야겠다!

책장#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ebook

이 책을 읽으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서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전국에 있는 흔한 이름 김지영. 지영이라는 이름은 내 주변에도 무수히 많다. 그런 ‘흔한’ 여자들이 한국 사회의 구조 속에서 겪는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이다. 김지영 씨는 광고 회사를 다니다 출산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산후 우울증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되었다가, 친구가 되었다가. 여러 자아가 빙의한다. 육아에 신경 쓰지 않는 남편에게, 명절이 되면 식모 취급을 하던 시댁 식구들에게, 지영 씨의 머릿속에 다른 자아가 찾아와 대신 말을 해 준다.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주변에서는 아무것도 안 한 걸까.

김지영 씨는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을 참아왔다. 남아선호사상이 짙었던 어린 시절, 지영 씨 3남매 중 단연 남동생만이 할머니의 편애를 받았고, 자연스럽게 ‘어디 감히 여자가’라는 말에 세뇌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지영 씨의 국민학교 시절부터 결혼 전까지의 사연들이 쭉 이어진다. 마치 내가 겪었던 그 시절 같은 스토리가 계속됐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자기주장을 마음껏 펼치지 못 했다.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왔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국민학교 급식 순번도, 대학교 때 성차별이나 희롱의 발언도, 취업에서도. 하고싶은 말은 속으로만 하고 꾹꾹 담아둔다. 그런데 애써 털어놓은 지영씨의 이야기를 들어준 정신과 의사마저 소위 ‘여혐’의 행동을 보이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소름 끼치는 마무리였다.

어렵게 취업한 김지영 씨는, 정말 열심히 일했고 일을 너무 좋아했다.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즐거움이었고 사랑이었다. 주변인들에게 인정받으며 자신의 존재감이 부각되는 통로였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려면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언젠가는 아이를 낳고 일을 포기할 때가 올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든 이 사회,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없어서 하던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가 원망스럽다. 정신 이상 증세는 지금까지 참아 온 모든 것들이 엉키다 결국 폭발해 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지영 씨의 정신 이상 증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남편보다도 더 위안이 될 것만 같았다. 안쓰럽고 씁쓸했다.

우연히 ‘며느라기’라는 인스타 툰을 보게 됐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집 조상 제사 음식을 시어머니, 며느리, 조카며느리가 준비하는 것이 당연시되어있다. 옛날처럼 심한 시집살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웹툰을 보면서 격한 공감을 했다. 단순하게 명절에만 한정된 현상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통념은 점차 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곳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나는 김지영 씨와 비슷하게, 어떤 과도기의 시점에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니 세대보다는 행복을 훨씬 더 많이 누리고 있다. 이 시대에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죄송하다. 지금과 어머니 세대와 할머니의 세대를 비교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92년생, 02년생 김지영 씨는 미치도록 행복하길 바란다 캬!

책장# 살인자의 기억법

이 책을 알게 된 건 영화 덕분이다. 나는 설경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설현이 연기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원작 소설만 읽고, 영화는 보지 않기로 했다. 영화 예고편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한 번 보았는데, 지금 머릿속의 장면들을 영화로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싹 사라졌다. 책으로만 기억하고 싶어졌다.

ebook기준 총 198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생각보다 엄청 짧은 소설이었다. 그런데 페이지 수 보다도 훨씬 빨리 읽었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김병수의 치매 증상이 얼만큼 심해지고 있는지 눈에 보였다. 글의 수가 점점 없어지는 부분은 좀 무서웠다. 치매가 점점 심해져서,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기억할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기억이 점점 사라지자 김병수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생각이 나지 않을 때마다 일기장과 녹음한 것을 확인한다. 그래도 본인이 희열을 느꼈던 ‘연쇄 살인의 추억’만은 잊어버리지 않았던 게 가장 무서웠다.

내 머릿속의 은희도, 박주태도 안형사도 영화와는 전혀 달랐다. 내가 상상한 은희는 설현같은 초미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은희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밝은 모습이 아니었다. 박주태도 엄청나게 무서운 인상을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김병수의 시선으로 이 모든 사람들을 관찰했기 때문에 생긴 이미지가 아닌가! 김병수는 70대 노인이고 연쇄 살인을 했고 시를 썼다. 살인범이 시를 쓰고 있다니, 당췌 상상할 수 없는 얼굴이다. 세기의 살인범들 얼굴이 떠올랐다가, ‘시 쓰는 치매 살인범 노인’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런 상상속의 이미지들도 얼마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김병수의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고부터는, 박주태가 누구인지 안형사는 또 누구인지 어디까지가 사실이었는지, 누가 누굴 죽인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치매 노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가 살인범이 맞는지까지도 헷갈린다. 김병수가 누구인지마저 헷갈리게 하고 끝난다.

해설서는 내 맘을 아주 꿰뚫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지극히 일반적으로 책을 읽어가고 있었고, 해설을 통해 그나마 어질어질했던 머리가 정리가 되었다. 그 전까진 치매와 살인과, 사랑하는 딸 은희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병수를 쫓아가고 있었는데, 이런 어지럼증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