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 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 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씁쓸하군

버스를 타고 언덕을 돌아 내려갈 땐 응암동, 신사동의 평화로운 모습으로 탁 트여서 기분이 좋았다. 이제 그 풍경은 힐스테이트에 사는 사람들이나 볼 수 있게 되나보네. 햇빛도 그들의 것. 풍경도 그들의 것.

이상한 상황극

버스 안. 치지직.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버스 7719편을 이용해주시는 손님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을 북가좌동에서 녹번역까지 모시고 갈 기장 칠일구 입니다. 지금 현재 저희 버스는 고도 4피트, 속도 약 50키로미터로 운행하고 있으며 현재 서부병원을 지나고 있습니다. 녹번역까지는 약 11분 소요될 예정이며 도착 시각은 녹번역 현지 시각으로 09:05 분 이 될 예정입니다. 도착 당시 녹번동 날씨는 맑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행복하세요, 용사여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이라는 책을 읽으며 출근하는 중이었다. 인문학 책을 읽을 때 최적의 음악인 take five는 삶에 대한 고찰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엄마, 분유 이제 180ml 먹여도 될 것 같애. 180미리가 얼만큼이냐구? 네 숟가락 반. 응. 알았어. 난 지금 책을 읽으며 출근하는 중이다. 음악도 잘 듣고 있다. 옆사람의 이야기가 오른쪽 귀에 섞여 들리기 전까지는. 너만 지각이야?…

박웅현 강연을 듣다

올해 6월,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책을 구경하다 문학동네 부스를 발견했다. 북적거리는 가운데 북클럽 연간 멤버십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혜택 안내문의 한 부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인생책 「여덟단어」 의 작가 박웅현 님의 강연이라니. 「생각의 기쁨」, 「모든 요일의 기록」 을 연이어 읽으며 두 작가가 직장 동료라는 걸 알고, 그들에게 오래도록 존경받는 팀장님이 동일인물이란 걸 알게 되고, 그 팀장님이 너무나도…

Read More

사랑하는 계절

자고 일어나니 바깥이 너무 환하다. 현관문을 열자 눈 앞은 온통 새하얗다. 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서 있는 드넓은 눈밭. 다행히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세상 모든 빛을 머금고, 눈부신 1월의 들판이 나를 기다린다. 눈을 찡그리는데 그 기분이 꽤 괜찮아 잠시 웃어 본다. 차갑고 맑은 공기를 힘껏 들이마신다. 상쾌함. 찌뿌드드한 몸을 쭈욱 폈다가 숨을 내쉰다. 그윽한…

CA CON 86 – Airbnb Design System 후기

https://www.cabooks.co.kr/con-86 사내에서 디자인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디자인, 개발팀이 노력하고 있다. 아직은 디자인시스템이라 명명할 수 없고 다져지지도 않은 상태지만 체계적이고 명료한 가이드가 제공된다면 좋을 것이라는 건 모두의 최종 goal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 굉장히 섬세하게 짜여있다고 생각했던 Airbnb 디자인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는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이번 컨퍼런스는 에어비앤비 디자인시스템 팀을 총괄하는 한유진 디자이너가 스피커를…

Read More

버스에서 든 생각

앞자리에서 아주머니가 안절부절 하신다. 카드를 찍어야 하는데 아차 싶은 모양이다. 아유 어떡해 가방을 안 가지고 왔어 아유, 기사님 기사님! 나 가방을 안 가지고 왔어. 다급한 목소리로 기사님을 계속 부르신다. 버스 기사님도 난감했는지 “아 근데 어떡하라구요.” “나좀, 세워줘요.” 좌회전 차선으로 진입하던 버스가 다시 차선을 바꾼다. 정류장에서 얼마 못 가서 아주머니는 내리신다. 문득 든 생각. 나도 나중에…

똑같은 어둠

소풍인 것 같다. 어릴 적 자주 갔던 큰솔밭스러운 딴세상 풍경이 어스름히 펼쳐져 있다.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울창한 숲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 보물찾기일까? 아니다. 나는 약간의 공포감에 휩싸여있다.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해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헤매고 헤매다 발길이 멈춰진 두 갈래길가운데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늙고 검은 나무의 형체. 나무는 둘레를 재기 힘들 정도로…

학교에서 해본 생각

졸업 후 학교를 찾아갔다. 도대체 이게 몇 년 만인지. 학교는 많은 발전을 했지만 우리들의 스무살은 그대로 간직해 주고 있었다. 학교 이곳 저곳에서 우리 반 사람들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추억들은 우리의 담소 거리가 되었다. 그때의 장면들을 하나 하나 소환 하노라면 코끝이 찡할 정도로 懐かしい하다.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교정을 산책하고 사진을 찍었다. 학교는 너무 아름다웠다. 걸음을 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