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을 채우는

사람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방식은 매우 다양해서, 저마다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인사이트를 얻는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으로 인해 얻는 마음의 양식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종이책만큼 다양한 장르의 ‘사람’이라는 책을 통해 인생 곡선을 그린다. 때로는 따라 해 보기도 하고, 존경심을 갖기도, 반성의 기회를 만들기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다짐하기도 한다.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책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그려진 나의 인생선과 맞닿아 있는 사람들을 그리며 글을 쓴다.

우연한 기회에 ‘인생 그래프 그려보기’를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큰 일들을 연도별로 적어보는 것이다. 기억나는 일이 많으면 1년을 다시 달로 나누어 적는다. 손으로 적기에는 꽤 영역이 넓으니 추가와 수정이 쉬운 프로그램을 활용한다. 적다 보면 내 인생이야말로 거대한 서사시다. 일기와는 또 다른 기분이다. 옛 일을 추억해보기에도 좋지만,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이 파일을 열어 보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인생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 무언가 변화가 생길 시점을 대략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되자고 결심한 19살 땐, 28살 정도 되면 커리어 우먼이 되어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그 뒤에 따르는 고통은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그리고 그런 환상 속의 나이에서 10년이 더 지난 지금. 난 커리어 우먼일까, 얼마나 현명할까, 얼마나 알차게 속을 채운 그릇이 되어 있을까? 인생 그래프 속에서 이제는 조금 변화를 줘도 될 시점인듯 하다.

부당한 배척을 당한 어느 날 이후로 나는 생각했다. 당당하게 소신 발언을 한 것에 대한 결과라면 고통을 받은 만큼 얻은 것도 있을 거라고. 굳이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겠다며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통받을수록 나를 더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내 인생 그래프의 붉은색 마이너스 포인트가, 이내 보물상자로 격상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자 속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촘촘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할 줄 아는 용기, 디자인 리더로서의 가능성, 정의의 편에 설 줄 아는 당당함과 도덕성, 그리고 근성이 들어 있었다. 절묘한 타이밍에 좋은 기회도 오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번지르한 겉표지와는 달리 막상 내용이 엉성하거나 내 취향이 아닌 책은, 비록 그 자체에서는 배울 것이 없더라도 스스로 한층 시야가 넓어진 자신을 만들어낸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 ‘후회’의 구절은 이러하다.

후회를 최대한 즐겨라.

슬픔을 억누르지 말라.

후회를 보살피고 소중히 여기면,

그만의 존재 목적을 가질 때가 올 것이다.

깊이 후회하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여덟 단어」에서 특히 감명깊었던 ‘見의 자세는 이 세상 모든 지루한 일상을 바꿔준다. 영화 ‘시’의 김용탁 시인의 이야기처럼 사물이나 사람은 면밀하게 살피고 나서야 시상이 떠오른다. 見의 자세를 알게 되면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식 또한 달라진다. 깊은 후회는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

아직 나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버려야 하는 책에 대해서도 구분할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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