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안대(遮眼帶)

주위가 산만하거나 공포심 등으로 불안한 경주마의 양 옆 시야를 차단하는 장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

디자이너의 성향은 주변의 문화와 환경에 물들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이 조직에서 4년 넘게 일하면서 무섭게도 조직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실감한다. 평소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는데 나이를 말하게 되는 것부터가 그 파장의 하나였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디자인이나 공부 등을 멀리 하는 이야기를 듣자면 가끔 내가 이상한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노력하는 게 정답인지, 애쓰고 있는 건 아닌지 답답할 때도 있다. 답답함을 답답해 하면서도 나도 똑같은 행동을 한다 생각되면 흠칫 놀라곤 한다. 니가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고등학교 시절 문학 선생님처럼 내 등을 한 번 시원하게 쳐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디자이너에게 나이는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일정 나이가 되면 관리자로 넘어가는 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기는 문화가 계속 나를 붙들고 있다. 출산과 육아와 경력 단절과 노장과 월급루팡과 어떤 40대 디자이너의 키워드랄까. 40이 넘으면 실무에서 손을 떼고 기술적 동향이나 디자인 트렌드에서 관심이 없어진다. 무언가를 내려놓고 버리는 게 수순인 듯 행동한다. 이제 수명을 다 했으니 변방의 노인으로 살아갈 것인 양 의욕도 자신감도 내려 놓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디자이너로서의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봐 왔다. 그렇게 행동하는 이들도 왕년엔 열정다운 열정 한 번 펼쳐봤을까.

스터디하던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스터디만 할 때는 몰랐던, 현업에서 오는 고충이나 앞으로의 계획, 비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연차와 나이에 상관 없이 다들 의욕이 넘치고 열정적이어서 모임 자체만으로도 에너지를 얻었다.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워커홀릭의 세상에 살짝 발을 담갔더니 왠지 무리들에 비해 도태되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다들 이야기한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를 때가 편한 것 같다고.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작업물을 공유하며 대외적으로 어필을 하고, 자신의 활동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에 자극을 받아 서로가 더욱 성장하는 시너지를 낸다. 열정의 향기가 나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 틈에서 우리는 자신이 가고 있는 위치가 어디쯤인지 고민하고 불안해 했고, 잘 하고 있음에도 조바심을 냈다. 세상에는 묵묵히 자기 속도를 걷는 디자이너들, 티 내지 않고도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 실상 우리 눈에는 밖으로 프로젝트를 공유하고 어필하는 이들만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전부가 아니니 조급해 하지 말자.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반은 한 거라고 생각한다. 끈질긴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눈에 보이게 되어 있다.

한 계단 더 오를 수 있음에도 쉽게 디자인을 내려놓으려는,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이 디자인의 전부라 여기는, 안정적인 회사에서 가늘고 길게 갈 거라는 그런 생각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과 내가 만족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남의 기준을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의 5년 전보다 지금이 더 열정적이고, 지금보다 5년 후가 더 프로다울 것이다. 지치고 다치며 많이 흔들렸던 날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2018년 마지막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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